에두아르 르베 자살을 천천히 읽는 방법

서점에서 얇은 책을 집었다가 제목 때문에 한참 망설인 적이 있다. 에두아르 르베의 『자살』도 그런 책이다. 제목은 단호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한 사람의 죽음을 설명하는 이야기보다 그를 기억하는 목소리에 오래 머물게 된다. 분량만 보고 금방 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면 조금 의외일 수 있다.
먼저 책의 배경을 알고 읽기
에두아르 르베는 글과 사진을 함께 작업한 프랑스 작가다. 『자살』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2008년 프랑스에서 출간됐다. 국내에는 한국화가 옮긴 128쪽짜리 책이 2023년 워크룸프레스에서 나왔다. 작가가 원고를 출판사에 보낸 지 며칠 뒤 사망했다는 사실도 책 소개에 함께 실려 있다.
이 이력은 독자의 시선을 강하게 끈다. 그런데 작가의 죽음에서 출발해 소설 속 모든 문장을 그의 마지막 생각으로 읽으면, 작품이 보여 주는 다른 장면들이 흐려지기 쉽다. 소설의 화자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를 향해 말을 건넨다. 작가의 삶에 관한 사실과 화자가 들려주는 기억을 구분해 두면, 책 속 인물을 더 가까이 볼 여지가 생긴다.
‘너’에게 건네는 말을 따라가기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말은 ‘너’다. 화자는 친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을 좋아했고 사람들과 어떻게 지냈는지를 떠올리며 줄곧 그에게 말을 건넨다. 독자는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앉아 있는 듯하지만, 정작 그 친구의 대답은 들을 수 없다. 그 빈자리가 이 소설의 조용한 긴장을 만든다.
이야기도 출생부터 죽음까지 차례로 이어지지 않는다.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장면 하나가 지나가면 다른 기억이 불쑥 나온다. 실제로 오래전에 떠난 사람을 떠올릴 때와 비슷하다. 어느 날의 표정은 선명한데 그 전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흐릿할 수 있다. 르베는 그런 기억의 움직임을 짧은 문장과 장면들로 옮겨 놓는다.
그래서 읽다가 앞뒤가 딱 맞지 않는다고 느껴져도 서둘러 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방금 읽은 장면에서 친구의 어떤 모습이 보였는지 생각한 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된다. 같은 사람을 두고도 다정한 기억과 낯선 느낌이 번갈아 드는 과정 자체가 이 책의 읽을거리다.
죽음의 이유 하나로 사람을 가두지 않기
누군가 스스로 생을 끝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유부터 묻게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은 한 가지 사건이나 성격으로 친구의 선택을 설명하지 않는다. 화자가 들려주는 일상에는 취향도 있고 관계도 있으며, 가까운 사람조차 다 알 수 없는 마음도 있다. 조각들을 모두 모은다고 해서 한 사람의 삶이 빈틈없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특히 친구의 죽음을 알고 난 뒤에는 평범한 행동까지 징후처럼 보일 수 있다. 소설을 읽는 우리도 비슷한 유혹을 느낀다. 그럴 때는 그가 무엇을 했는지와 화자가 나중에 그 행동에 어떤 의미를 붙였는지를 나눠 보면 좋다. 남은 사람이 과거를 다시 읽는 일은 자연스럽지만, 뒤늦게 붙인 의미가 그 사람의 전부가 되지는 않는다.
읽는 속도를 스스로 정하기
국내판은 128쪽이라 하루 만에 읽을 수도 있다. 다만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만큼 한 번에 끝내야 할 이유는 없다. 몇 쪽을 읽고 쉬었다가 돌아와도 장면을 따라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마음에 남는 대목이 있다면 줄거리보다 ‘왜 이 기억이 남았을까’를 잠시 생각해 보는 편이 이 책과 잘 어울린다.
읽는 동안 개인적인 기억이 떠오르거나 마음이 버거워질 수도 있다. 그럴 때 책을 덮고 쉬거나 믿을 만한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괜찮다. 독서에는 정해진 속도가 없다. 『자살』을 읽고 나면 나는 한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과 끝내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이 함께 남는다. 그 사이에서 친구의 평범한 순간들을 오래 바라보게 된다.
